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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의 유래

전주류씨의 유래

전주류씨의 유래

   류습(柳濕)을 시조(始祖)로 하는 전주류씨는 첫 번째 족보인 임진보(壬辰譜)에 문화분관설(文化分貫說)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문화류씨(文化柳氏)로부터 분관(分貫)된 성씨(姓氏)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안동의 수곡파 류병문(柳炳文) 선조님은 전주류씨 보계변증(譜系辨證)을 편찬하여 전주류씨의 문화분관설을 부인(否認)하고 토성(土姓) 전주류씨(全州柳氏)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약 50년 후 고종13(1876)년에 발간(發刊)한 병자보(丙子譜)에 류병문 선조님이 지은“전주류씨보계변증”을 수록하여 전주류씨는 토성(土姓) 성씨(姓氏)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재정(財政) 문제로 발간이 중단된 1924년의 갑자보(甲子譜)에는 병자보의 보계변증에 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하는 반증문(反證文)을 수록하여 문화류씨분관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전주류씨 연원을 탐구(探究)하고자 문헌을 수집하면서 1600년대에 조종운(趙從耘)이 편찬한 씨족원류(氏族原流)와 1932년 정래화(鄭來和)가 편찬한 전주생진청금록(全州生進靑襟錄)에 전주류씨는 시조가 다른 류습(柳濕)파, 류혼(柳渾)파, 류지(柳池)파의 3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전주류씨는 평장사(平章事) 류방헌(柳邦憲), 류광식(柳光植), 류소(柳韶)를 배출한 명문가(名門家)였으며, 고려 말에 류능(柳能)은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실력자 최의(崔竩)의 측근이었다.

   그런데 문화류씨 대사성(大司成) 류경(柳璥)과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등이 일으킨 무오정변(戊午政變)으로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의가 주살(誅殺)될 때 류능도 함께 피살당하여 전주류씨가 몰락하게 되었다.

   류능이 피살된 후 그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약 2세대가 지난 후에 류습(柳濕), 류혼(柳渾), 류지(柳池)를 시조(始祖)로 하는 전주류씨 3파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류습(柳濕)을 시조로 하는 족보(族譜)를 보면 문화류씨 및 우주류씨를 배위(配位)와 사위[婿]로 맞이한 선조님이 종종 있는데 우주류씨는 부친(父親),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의 성함(姓銜)이 류혼(柳渾)파 및 류지(柳池)파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최근에 전주류씨 대종중 류정훈(柳政訓) 부이사장에 의하여 밝혀졌다.

   조선시대는 중국의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동성동본(同姓同本)간의 결혼(結婚)을 금지하였고, 더욱이 현종 때는 동성(同姓)끼리도 금혼(禁婚)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류습(柳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문화류씨(文化柳氏) 및 전주류씨 류혼(柳渾)파 및 류지(柳池)파와 통혼(通婚)을 하여 왔다.

  따라서 류습파 전주류씨는 문화류씨에서 분관된 성씨(姓氏)가 아니며, 또한 류습(柳濕)은 류혼(柳渾) 및 류지(柳池)와 형제간이 아니며, 혼맥(婚脈)으로 얽혀진 사돈 간인 것이다.

   최근에는 백제 무왕(武王) 때 사천왕사를 지으러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이 전주류씨(全州柳氏)로 밝혀짐에 따라 전주류씨는 고려 초에 창성(創姓)된 문화류씨보다도 먼저 통일신라를 거쳐 백제 때도 있었던 성씨(姓氏)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주류씨가 백제 때부터 있었던 성씨(姓氏)란 것이 밝혀졌지만 시조(始祖) 상대(上代)의 계대(系代)를 이을 수 없으므로 앞으로 더 연구를 하여 고증(考證)할 문헌이 발굴되어 계대가 밝혀지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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