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류씨의 연혁
전주류씨의 연혁[인물]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생몰년대(生沒年代)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위 대제학(大提學) 심효생(1349∼1398)이 고려 충정왕1(1349)년에 출생한 기록으로 보면 전주류씨는 약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시조(始祖) 습(濕)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克恕), 셋째 아들 극수(克修), 넷째 아들 극제(克濟), 막내아들 극거(克渠)와 사위 심효생(沈孝生)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 大科)에 급제를 하면 국법(國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妣)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고,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연안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대도로부사를 하였다.
빈(濱)의 아들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이조ㆍ예조참판을 하였고,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손]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계동(季潼)의 큰아들 식(軾)은 인천도호부사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轂)은 전라도 고산현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리에 있는 시조 묘에 5대봉사(奉祠)의 기틀을 마련하여 모시도록 하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으며, 식(軾)의 큰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대사헌, 예조 참판, 한성 우윤(右尹) 등을 지냈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헌(軒)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이 되어 부친 의(儀)도 전릉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9세 기봉공[복기], 묵계공[복립], 별암공[지강], 정암공[지기]은 임란 때 의병장으로 의와 충을 실천하여 참 선비의 표본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호성공신으로서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이 되었고, 인조 때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진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 정량(廷亮)은 사은사(謝恩使),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으며, 전창군의 부친 열(悅)은 전원군에, 송설체(松雪體) 글씨에 능한 전원군 아들 심(淰)은 참판으로서 전평군에 봉해져 5대가 봉군(封君)이 되었다.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 질(秩)은 인조1(1623)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 )하여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에 맞서다 전사(戰死)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오른 경창(慶昌)은 사마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고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안동의 기봉공[복기]과 함께 실전(失傳)된 직제학공[극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다.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고양시와 용인시에 있는 묵계공 비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중 선조(先祖)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춘관지(春官志) 등을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善政)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무과(武科)로 참령(參領)을 하였고, 정(珽)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고, 정수(正秀)는 탁지부 차관을 하였다.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舊韓末)에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주사(主事)를 하고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와 광문회(光文會)사업에 종사하였고, 휘문의숙장[교장], 중앙학교장을 하였으며, 3ㆍ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인식(寅植)은 민족운동가ㆍ교육자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그의 손자 기홍(基洪)도 제17,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내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종중 학교인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으며,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안동 및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광해정변(光海政變)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반(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61,650명[19,008가구]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주류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개파 즉, 혼(渾)파, 습(濕)파, 지(池)파가 있으므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이보다 약간 적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