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인물1
2세 연안부사 류극서(柳克恕) ? ( ? )∼우왕14(1388)
[공은 직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안부사가
더 높은 직급이므로 표제를 연안부사로 하였다.]
시조 완산백(습)의 둘째 아들로서 출생연대는 알 수 없다. 배위 진주 하씨는 진양부원군 하윤린(河允潾))의 따님으로 첨지공[汀]을 낳고, 배위 수원 이씨는 밀직사 이인수(李仁壽)의 따님으로 아들 영흥공[濱]을 낳았다.
공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9(1383)년에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를 하였고, 우왕11(1385)년에 천호(千戶)로서 당직을 하였는데 옥에 가둔 환관 (宦官) 김실이 도망가자 그 죄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우왕13(1387)년에는 판사복시사 임수(任壽) 및 전공판서 김승귀(金承貴)와 함께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로서 요동에 갔다 왔고, 중정대부(中正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우왕14(1388)년 연안부사를 하였는데 3년전 천호를 할 때 옥에 가둔 환관(宦官) 김실을 도망가게 한 죄로 김실과 함께 우왕에 의하여 피살 당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군 녹전면 죽송리의 범바위 마을 부근 류빈동(柳濱洞)에 있다.
옛날에 비석이 있었으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어 선조39(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 영순(永詢)이 새로 작은 비석을 세웠다. 증숙부인 진주하씨 묘소는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있고 증숙부인 수원이씨 묘소는 직제학공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재실 호암재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족보] [고려사] [동국통감]
3세 영흥부사 류 빈(柳 濱) 공민19(1370)∼세종30(1448)
직제학공[극서]의 작은 아들이다. 배위 덕산 윤씨는 윤방익(尹邦益)의 따님인데 경손(敬孫), 의손(義孫)과 신손(信孫)을 낳고, 후배위(後配位) 단양 우씨는 우순(禹順)의 따님으로 막내아들 말손(末孫)을 낳았다.
공은 고려 우왕8(138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우왕12(138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 지평(持平), 경주부 도사, 영천 군수, 장령(掌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통정대부로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지내었다.
세종30(1448)년에 별세하니 수(壽) 79세이다. 둘째 아들 의손(義孫)이 고관(高官)이 되어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묘소는 경북 영주군 문수면 승문리 산173번지 종릉산(鐘陵山) 기슭 류릉골에 있다.
봉분(封墳)은 육각정석(六角井石)을 쌓은 팔각묘(八角墓)로서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종릉(鐘陵)으로 불리었고 매년 국가(國家)에서 제사를 지내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중지되었다고 하며, 최근의 지도(地圖)에는 류릉산(柳陵山), 류릉(柳陵)으로 표시되어있다.
옛날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마모되어 선조39(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 영순(永詢)이 작은 비석을 세우고 이때 지은 재실(齋室)은 종릉재사라 하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초배(初配) 증정부인(贈貞夫人) 덕산 윤씨는 영흥공과 합장을 하였고 후배(後配) 증정부인(贈貞夫人) 단양 우씨 묘소는 전남 남원시 고죽동에 있다.
[족보] [조선왕조실록] [동경통지] [여지도서 영천군지]